【우리일보 김지윤 기자】 한국 연기계를 대표하는 원로배우 이순재가 25일 새벽 별세했다. 향년 91세. 국내 최고령 현역 배우로 방송·영화·연극계를 종횡무진하며 한국 대중문화의 굵직한 장면을 함께 만들어온 그였기에 연예계는 물론 문화계 전반에 깊은 애도가 이어지고 있다.
유족에 따르면 이순재는 평소 지병으로 치료를 이어오다 이날 새벽 영면했다. 고인은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네 살 무렵 조부모를 따라 서울로 내려왔으며, 이후 서울고·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1956년 연극 ‘지평선 넘어’로 데뷔하며 배우의 길을 시작했다. TBC 전속 배우로 활동한 1960년대부터 드라마와 연극을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고, TV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던 1970~80년대에는 친숙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연기로 시청자들의 신뢰를 얻었다.
고인은 지난해 10월 건강 문제로 활동을 잠정 중단하기 전까지도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KBS2 드라마 ‘개소리’ 등에 출연하며 마지막까지 무대와 카메라 앞에 서 있었다. 2024년 KBS 연기대상에서는 최고령 대상 수상자가 되는 영예를 안으며 “배우는 평생 배운다”는 자신의 소신을 현실로 증명했다.
이순재의 삶은 연기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민주자유당)으로 당선되며 정치권에서 한 차례 활동하기도 했다. 국회에서는 민자당 부대변인, 한일의원연맹 간사 등을 맡아 문화·교육 정책 분야에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정치 활동을 마무리한 후 다시 연기 현장으로 돌아와 후배 배우들에게 “배우의 본령은 현장에 있다”고 조언하던 모습이 여러 차례 전해지기도 했다.
후학 양성에도 열정적이었다.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직접 수업을 진행했고, 여러 방송에서 연기 철학과 무대 태도를 강조하며 젊은 세대의 존경을 받았다. 제자들은 “수업 시간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늘 배우로, 교육자로서 품위를 지켰다”며 고인을 기렸다.
한국 방송사에 길이 남을 명대사와 캐릭터도 수없이 남겼다. 인간미 있는 아버지, 꼿꼿한 원로, 엄격한 교수, 때로는 코믹한 캐릭터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맡은 역할마다 깊이를 더하며 대한민국 시청자들에게 오랜 시간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문화계 관계자는 “한국 드라마와 연극의 역사를 통째로 관통한 인물”이라며 “그의 연기와 철학은 앞으로도 긴 시간 우리 사회에 회자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장례는 가족들의 뜻에 따라 조용하게 치러질 예정이며, 빈소와 발인 등 구체적인 절차는 추후 안내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