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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교도소 ‘312번’에서 구청장 도전까지…김상수 미추홀정치연구소장의 인생 역전 스토리

노동운동·공직 21년·기술인 봉사활동까지…“평등과 위로의 행정 만들겠다”

 

【우리일보 최은준 기자】소년교도소 수인번호 ‘312번’으로 불리던 한 소년이 노동운동과 공직생활, 그리고 기술인 봉사활동을 거쳐 지역 정치에 도전하고 있다.


김상수 미추홀정치연구소장의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굴곡진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평등과 위로의 행정을 실현하는 구청장이 되겠다”며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김 소장이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은 학익동 소년교도소에서 보냈던 시간이다.


당시 그는 이름 대신 수인번호 ‘312번’으로 불렸다.


교도관이 “312번 면회”라고 부르면 어머니가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하루 한 번, 단 5분의 면회 시간이었지만 어머니는 거의 매일같이 면회를 왔고 짧은 시간 동안 눈물을 흘리다 돌아가곤 했다.
그가 교도소에 수감된 계기는 17세 때 발생한 교통사고였다.


당시 그는 버스회사에서 정비공으로 일하며 밤에는 차량을 점검하고 낮에는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는 주경야독의 삶을 살고 있었다.


버스 고장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시운전을 하던 중 오토바이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고, 무면허 운전이 문제 되면서 구속됐다.


피해자는 8주 진단을 받았다.


소년교도소에서 3개월을 보낸 뒤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그 과정에는 가족의 희생이 있었다.


사고 합의금 50만원은 방직회사에 다니던 동생이 월급을 모아 마련한 돈이었다.


전남 해남에서 올라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던 동생에게 50만원은 결코 적지 않은 돈이었다.


김 소장은 “동생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며 “가족의 눈물과 희생이 평생의 빚처럼 마음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소년 시절 그는 버스정비공으로 일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밤 10시부터 새벽까지 버스를 점검하고 아침에는 회사 기숙사 식당에서 식사를 한 뒤 검정고시 학원에 다녔다.


수업이 끝나면 다시 기숙사로 돌아와 잠을 자는 생활을 반복했다.


한 달에 두 번밖에 쉬지 못하는 강행군 속에서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앓아온 축농증 역시 큰 고통이었다.


기숙사 생활 중 심한 코골이 때문에 한겨울에 밖으로 쫓겨난 기억도 있다.


이후 돈을 모아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고 친구들이 병원에 찾아와 수박을 사다 주며 위로해주던 기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이후 김 소장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24세 때 인천 시내·시외버스회사 15곳이 참여한 연합노조위원장을 맡으며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활동했고, 이 과정에서 해고를 겪기도 했다.


이후 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해 공부를 이어갔으며 대학 시절 정치연구회와 동아리를 조직해 사회문제에 대한 활동을 지속했다.


그는 이후 공직에 들어가 21년 동안 행정 현장에서 근무했다. 노동 현장의 경험과 학업, 공직 경험이 더해지며 지역사회와 행정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왔다.


김 소장은 기술인들의 사회공헌 활동에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현재 한국마이스터연합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이 단체는 각 분야 명장과 기능장 등 기술인들이 모여 봉사활동을 펼치는 조직이다.


그는 사무총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하며 단체 운영을 이끌어 왔고 현재는 공동대표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매년 두 차례 인천 도서지역을 찾아 전기·설비·기계 등 다양한 분야의 기술 봉사활동을 진행하며 주민 생활환경 개선에 힘을 보태고 있다.


낡은 시설을 수리하고 생활 불편을 해결하는 활동은 섬 주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김 소장은 “기술인들이 가진 재능을 사회에 나누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며 “봉사를 통해 지역의 어려움을 더 가까이에서 보게 됐다”고 말했다.


출신 지역과 노동운동 경력 등으로 인해 ‘빨갱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는 그는 “그런 경험들이 오히려 사회를 바라보는 신념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김 소장은 “소년교도소 수인번호로 불리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경험을 지역사회를 위해 쓰고 싶다”며 “평등의 구청장, 위로의 구청장이 되어 주민이 중심이 되는 행정을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잘못된 관행은 과감히 바로잡고 권력의 낡은 구조를 바꾸겠다”며 “새로운 시대에 맞는 행정과 지역사회를 만들어 가겠다”고 말했다.